1) 위화도 회군 배경
1388년(우왕 14년), 우왕은 최영과 함께 요동정벌을 계획한다. 당시, 고려를 지배하던 원나라(몽골)의 국력은 약해지고 명나라가 떠오르는 시기였다. 주원장(명나라 초대왕)은 원래 원나라가 지배하던 철령 이북의 땅이 자신의 땅이라 주장했고 고려는 이에 대해 반발했다. 하지만 명나라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우왕과 최영은 요동정벌을 모의하게 됐다.
한편으로 최영 장군이 이성계에 무리하게 요동정벌을 요구한 것은 권력 싸움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최영 장군은 고려 충신으로 구세력이었고 이성계는 새롭게 떠오르는 세력으로 급진파 신진사대부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최영은 이러한 점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이성계에게 무리하게 요동정벌을 요구했다고 전해진다.
2) 위화도 회군( feat. 4불가론 )
우왕은 팔도도통사에 최영을, 좌군도통사에 조민수를, 우군도통사에 이성계를 임명했다. 팔도도통사는 고려의 제일 높은 장군이고 좌군도통사와 우군도통사는 그의 양쪽팔이다. 최영은 고려 충신이며 청렴한 사람으로 유명하며 ‘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지만 출신이 권문세족(원나라 간섭기 친원파 세력)이라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성계는 아래와 같이 4가지 근거를 바탕으로 ‘4불가론’을 주장하며 요동정벌의 불가함을 보였다.
-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부당하다.
- 여름철에는 전염병이 창궐한다.
- 장마철이라 비가 오면 활의 아교가 다 풀어진다.
- 나라의 군사가 모두 진출하면 왜구를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우왕은 그대로 요동정벌을 진행했고 결국 이성계와 조민수는 압록강에 있는 위화도에 도착했다.( 공식적으로 위화도 위치는 현재 압록강 사이에 있다고 알고 있지만 압록강을 지나 현재 위화도 위치에서 30km 떨어진 곳이 진짜 위화도라는 주장도 있다. ) 하지만 병사들의 사기는 저하되고 탈영병까지 생기자 이성계는 다시 한번 요동정벌 중지에 대한 건의했고 당연히 묵살당했다. 고민을 하던 이성계는 결국 조민수와 같이 개경(지금의 평양)으로 회군을 하며 쿠데타를 일으키게 됐다.
결국 우왕은 폐위되고 최영은 유배를 갔다. 우왕의 다음으로 우왕의 아들인 창왕이 왕위에 올랐지만 명나라의 입김으로 폐위되고 공양왕이 즉위했다. ( 우왕과 창왕은 공민왕(우왕 전 왕)의 혈통이 아닌 신돈의 혈통이라는 논란이 있다. ) 그리고 이성계는 1392년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에 오르며 조선을 건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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